독도 갈등 미국이 불 지르다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중앙일보
1904년 9월 일본은 곧 다가올 러시아 함대와의 결전에 대비해 울릉도에 두 개 망루를 세웠다.
1905년 1월 일본은 독도를 우리의 품에서 앗아갔다.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을 통해 미국 영국 중국은 전후 일본 영토에 대한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천명했다. 일본의 영토를 1868년 메이지 유신 이전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될 것이다." 이 선언의 정신이 지켜졌다면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영토분쟁은 없었을 것이다.
1947년 3월부터 1949년 11월까지 만든 5차례의 초안 모두에 독도는 한국 땅으로 명시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 점령 직후 대일 점령정책을 펼치며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정하는 모순된 조치를 취해 두 나라 사이의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6.25전쟁 이후 미국은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해 독도 귀속문제에서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1949년 11월 맥아더의 정치고문인 시블드의 보고가 있은 후 미국은 6차 초안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누락시켰다.
1951년 8월 러스크 국무부 차관보는 한국의 독도 주권 요구를 일축했다. “미국의 정보에 의하면 리앙쿠르 바위*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한번도 없고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현 관할 하에 있었다.”라고 했다.
* liancourt rocks, 즉 독도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 연합국과 일본이 체결한 평화 조약. 제2차 세계 대전을 종결하기 위하여 체결하였다.
1952년 1월
1953년 6월 일본 해상보안청과 외무부 관리 30여 명이 독도에 불법 상륙해 '일본국 시마네현 다케시마'라는 나무 표지판을 세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4년 1월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도 남면 독도'라는 영토 표지를 암벽에 깊숙이 새겨 넣었다.
미국은 여러 나라 사이에 분쟁의 불씨 심어놓기를 좋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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